인터넷과 SNS의 영향으로 지난 몇 년간 잡지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패션 잡지 보그, 시사 잡지 타임 등 세계 유명 잡지는 그 위상을 유지하며 권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잡지의 발행에 있어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아마 '표지'가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특히 오랜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잡지의 커버에 등장하면 뉴스에서도 나올 정도이죠. 모델이나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잡지 표지에 한 번 등장하고 싶어 하며, 정치인, 사업가 등은 시사 잡지 표지에 등장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만큼 표지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렇게나 중요한 잡지 표지에는 지금까지 보통 인물 사진이 실렸습니다. 당대 가장 인기있고 화제가 되는 인물들이 멋진 포즈와 함께 표지에 등장하는 것이죠.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런 오래된 전통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요즘 잡지에는 '사진' 대신 '예술작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요.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환경 보호
한 장의 완벽한 인물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소비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보그의 편집장은 잡지에 들어갈 사진을 찍기 위해 150명의 사람들이 20번 이상 비행을 하고 12번 정도 열차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또한 40여 대의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어야 하며 60번 정도의 국제 운송이 이뤄지고, 최소 10시간 동안 계속해서 조명을 켜 둬야 하죠. 모델과 스텝들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음식물 쓰레기와 비닐, 플라스틱 등이 나오며 핸드폰과 카메라를 충전하기 위해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고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현재 패션계의 화두 중 하나는 '환경보호'인데요. 이에 사진 촬영 대신 예술가들에게 의뢰한 예술 작품을 표지에 싣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바로 이탈리아 보그였습니다. 2020년 1월 이탈리아 보그에는 사진 대신 일러스트가 실렸는데요. 이는 보그 이탈리아의 모회사인 콘데나스트에서 '환경친화적인 임무를 수행할 것'을 약속한 이후 이뤄진 행보였습니다. 구찌 이탈리아에서는 일러스트 작가에게 구찌의 옷으로 스타일링 된 모델들을 보고 일러스트를 그려달라고 했고, 이는 큰 화제가 되었죠.
2. 사회 문제에 목소리 내기
지난 여름 미국 사회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는 경찰의 왼쪽 무릎에 짓눌려 목숨을 잃었고 흑인 여성 브론나 테일러는 마약 수색을 이유로 거주지에 침입한 경찰에 의해 사살된 것이었죠. 이 사건으로 인해 인종 차별 반대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에 참여했죠. 잡지사에서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조지 플로이드와 브론나 테일러 사건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잡지 표지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진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베니티 페어에서는 아티스트 에이미 셰럴드에게 '반항적인' 브론나 테일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으며 보그는 아티스트 제임스 마샬과 조던 카스텔에게 흑인 여성에 대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죠. 이 잡지들은 패션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냈는데요.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잡지의 행보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발행하는 오매거진에서도 알렉시스 프랭클린이 그린 브론나 테일러의 초상화를 표지로 사용했습니다.
3. 코로나19
지난해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또한 잡지 표지에 사람이 아닌 예술작품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모델, 사진작가, 스타일리스트,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 어시스턴트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요. 이는 코로나19의 감염 위험을 높이는 행동입니다. 또한 많은 국가에서는 엄격한 봉쇄를 시행했기에 사람들이 모일 수 없었죠. 이에 잡지사에서는 사진 촬영 대신 예술 작품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잡지사들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요. 코로나 기간 동안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사진 촬영을 하는 것보다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예술가들을 섭외하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유명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는 것을 최고의 커리어로 여기기에 그리 큰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예술 작품을 의뢰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타임지의 경우 수년 동안 아티스트들에게 같은 보수를 지급해왔습니다. 그러나 타임지는 6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독하는 잡지이기에 적은 돈을 받고도 그리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 것이죠.
4. 감정의 전달
그림은 사진과는 다른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힘은 그림이 잡지 표지로 갈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죠. 브론나 테일러의 초상화를 실었던 베니티 페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키라 폴락은 '테일러에 대한 잡지 표지를 구성하고 싶었지만 온라인에 떠돌던 테일러의 사진을 표지에 넣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 것 같았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진짜 초월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테일러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또한 타임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D. W. 파인은 '잡지 표지는 더 이상 사실을 전달하지 않으며, 이 역할은 SNS가 대체하고 있다'라고 밝혔는데요. 오늘날 표지의 목적은 '정보보다는 감정의 전달'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즉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설명하는 것은 SNS의 몫,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이 일에 대한 토론을 촉발시키는 것은 '잡지 표지의 몫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것입니다.